한 해 중 가장 마음속에 정적이 찾아오는 구간이다. 이름하여 신정과 구정 사이. 이 기간이 지나면 봄이 오든 말든, 꽃이 피든 말든, 창틈으로 찡겨 있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유령 같은 진실을 앞세우고 무엇이 되든 이리저리 물어보며 다녀야 한다.
각자의 형상을 제대로 그려 내기 위한 출발. 새 학기가 있는 3월은 그렇게 오지만, 지금 잠시 눈밭에 서리는 냉기는 계절이기에 당연하고 두꺼운 외투 안에 따뜻해야 할 몸이기에 은은하게 서럽기도 하다.
이렇게 감상적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계절의 감회는 해마다 진동한다. 나의 평온한 나날을 흔드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점점 과거가 되어가는 것 같다. 과거를 자꾸 반추하는 것은 영화 영사기를 돌리는 것과 같으니 꺼버리고, 현재를 살라는 조언도 있지만, 과거를 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바람 앞 모래성이 맨 위부터 흩어지듯, 기억도 최근 것부터 사라지고 결국 탄탄한 기억이 삶을 받히고 오늘을 부추긴다.
서울에 온 관광객에게 추천할 쇼핑 장소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 어떤 인플루언서 디자이너분이, 강북에서는 명동과 인사동, 강남에서는 성수동과 가로수길을 추천했다. 국내인인 나도 오랜만에 강을 건너 쇼핑하러 간다.
어둠으로 그늘진 시간, 성수역에 내렸다. 수제화 간판이 동네를 알리는 입구를 지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자동차 수리 매장과 새로운 커피점, 그리고 매력적인 의류매장이 반복되며 지역의 윤곽을 드러낸다. 직원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의류 매장에서 진열품 옷걸이 사이를 지나다 따뜻해 보이는 니트 한 점을 골랐다.
일찍 소등하는 업종이든 비교적 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업종이든 변화의 물결이 출렁인다면 서로 간에 파도를 잘 넘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른 쇼핑 명소인 가로수길은 3호선 신사역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의류나 잡화 구경도 했지만, 거리의 표지나 장식을 보며 길 자체를 즐겼다.
그러다 들어가게 된 곳은 결국 한 구석의 미술 갤러리였다. 조명이 꺼져있어 어두운 곳까지 그림을 살펴보면서 큐레이터의 의도를 가늠해 본다.
가로수길은 가로수라는 말을 원형으로 인근에 세로수길, 나로수길, 다로수길이란 길 이름이 파생되어 모국어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한국의 뉴스나 드라마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든 나는 나대로 또 관심 가는 책을 골라 읽고 내가 사는 지역을 재발견한다. 육이오 때 연희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쟁사(戰爭史) 책에서 읽고 전적비가 세워진 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고르지 않은 춥고 바람 부는 날,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노선버스를 탔다.
익숙하지 않은 정류장이기에 지나치지 않도록 집중하며 연세대학교 다음다음인 ‘연희104고지’ 정류장에서 내렸다. 연희고지는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산으로 1950년 9월 21일부터 9월 23일까지 한미 해병대가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전투가 종료된 이후 아군 전사자는 178명, 인민군 사망자는 1,750명이었다.
연희고지에서 적을 격퇴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서울탈환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연희고지 전투, 위키백과) 장병의 숭고한 희생에 고개 숙이며 추모의 마음으로 ‘해병대104고지전적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지 아래 펼쳐진 동네전경을 내려다본다.
전쟁은 승자에게도 영원한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어떤 전쟁에도 승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전도 휴전도 아니고 전쟁은 지금 즉시 멈추어야 한다.
신순영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원
고려대 농학박사
soonyoun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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