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미국에서도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 중이다. 영어 제목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라는 이 드라마는 여러 나라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궁금한 마음에 시청해보았는데,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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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건 문인협회 회원들이 임영희 시인의 첫 시집 출간을 축하하고 있다. 앞줄 왼쪽 두번째 임용근 전의원, 임영희 시인 |
제주도 해녀의 딸인 여주인공 오애순은 가난과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순정파 남편 양관식의 사랑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낸다. 그녀는 할머니가 된 후 지난날을 회상하며 삶을 되짚는 인생 드라마 속 인물로, 가족 간의 진한 사랑과 이별의 장면은 가슴 뭉클하고 눈물을 자아냈다.
특히 마지막 편이 인상 깊었다.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했지만 문학소녀로 시인을 꿈꾸던 오애순은, 할머니가 되어서야 ‘폭싹 속았수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하며 평생의 꿈을 이룬다.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침 마지막 드라마를 본 날 나는 또 다른 시집 한권을 받았다. 마치 오애순으로부터 ‘폭싹 속았수다’ 시집을 받은 것같은 감동과 도전을 느꼈다.
그 시집의 제목은 ‘아름다운 동행’.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시집의 저자가 드라마 속 오애순보다 훨씬 많은 86세 고령의 여성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80세에 뇌졸중을 겪은 뒤 시를 쓰기 시작했다니 정말 경이로웠다.
그 주인공은 임용근 오리건주 전 상원의원의 부인인 임영희 시인. 86세인 지난해 선보인 144페이지 첫 시집에는 1부 이 가을엔, 2부 인연, 3부 고향의 들국화, 4부 봄이 오는 소리로 모두 80 편의 시들이 실려 있었다.
시집을 읽으며 마치 또 다른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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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동행 시집 표지 |
신문사에 근무해 이민 온 후부터 40년 동안 임용근 전 5선의원과 임영희 시인 부부와의 오랜 인연이 있어 특히 3년 전 임의원 자서전 ‘버려진 돌, Rejected Stone'을 대필했을 정도로 그들의 삶을 잘 알고 있는데 그녀의 시집에는 당시의 많은 이야기들이 시로 승화되어 담겨 있었다.
임 시인이 오리건 문인협회에 참석하며 시를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작품들이 80대에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화려하거나 감상적인 문체 때문이 아니라, 시 속에 진실한 그녀의 삶과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뇌졸중으로 죽음 직전에까지 도달해 본 후에야 비로써 나 자신만을 위한 내가 갈망하던 글을 늦게나마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80세에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움직일 수 있는 오른쪽 팔다리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서북미 문인협회 주관 뿌리문학 공모전에 응모해 입상하였으며 오리건 문인협회에 가입해 시를 쓰고 ‘세계시문학지’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실력을 보인 그녀는 이제는 오히려 뇌졸중 위기를 감사하고 있다.
-뇌졸중으로 마비된 왼쪽 팔다리 /이 년여 힘겨운 재활 운동으로 / 이제야 겨우 / 정상을 찾아가는데 / 느닷없이 / 오른쪽 다리를 부러뜨려 놓으니 / 다시 반복되어야 하는 연단의 세월 / 그 고통과 절망, 슬픔 / 감당할 길 없네- (상처 중에서)
“생각건대현재의고난은장차우리에게나타날영광과족히비교할수없도다.”(로마서 8장 18절) 그 말씀이 현실이 되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질곡의 삶 속에서 내 삶의 흔적을 보석 같은 언어를 찾아 다듬고 꿰 맞추어 한편의 시어로 탄생시켰습니다. 혼자만 보듬어 안고 쌓인 시를 이제는 시집으로 엮어 세상 빛 앞에 수줍게 서 봅니다.”
임영희 시인은 ‘폭싹 속았수다’의 오애순처럼 해녀의 딸은 아니지만, 그녀의 삶 또한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국어 교사로 여주 중·고등학교에 재직하던 중 여주성결교회에서 전도사였던 임용근 씨를 만나, 1963년 12월 한국에서 결혼했다. 슬하에 두 아들과 세 명의 손주가 있다.
특히 미국 이민 초창기에는 청소, 세탁, 페인트 일 등 온갖 고생을 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 남편은 미국 한인 이민사상 최초로 오리건주 상·하원 5선에 성공했고, 그녀도 오리건 한인회장을 역임했으며 남편의 선거와 의정 활동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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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62년에도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임용근 전 오리건주 상원의원과 임영희 시인 |
이처럼 세상살이에 바빴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는 여유도 없었지만 80세에 뇌졸중을 앓고 난 뒤 비로소 지난 삶들을 회상하며 아름다운 시를 창작할 수 있었다.
그 시 속에는 고향, 가족, 이민생활, 신앙, 부부애 등 삶의 깊은 향기가 묻어있다.
“임 따라 천리만리 /태평양 건너와서 /영롱한 꿈을 안고/낯선 땅에 우뚝서 / 희비로 지내온 삶이 오십년을 넘겼네 / 임의로 살고 싶은/ 마음은 접어두고 /영원한 반려자의 /꿈 함께 가꾸면서 / 희망의 금자탑 이룬 보람된 삶이었네.”(임영희 자화상)
임영희 시인의 작품에 대해 김현탁 문학박사는 “임영희 시인은 이 시집에서 미국 시민의 집단의식에서 벗어나 내면에 잠복해 있던 원천적 그리움을 도시 밖의 ‘나’로 표방한다. 그 그리움은 고향의 하늘과 신앙심의 갈구로 나타난다. 샘처럼 솟아오르고 바람처럼 불어오는 잠재된 무의식의 물결이 사상의 공간을 탈출하여 일상 속 갇혀있던 욕망의 그물을 걷어내고 시의 하늘을 비행한다.” 라고 해설했다.
“나이 팔십을 바라보면서 늦게나마 작품을 쓸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준 오리건 문인협회에 감사한다.”는 임 시인은 “남은 여생도 더 좋은 작품을 쓰기에 심혈을 다하겠다.” 며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뿐 아니라 2년 전부터 시조 강좌도 열심히 수강한 그녀는 수십 편의 시조를 써서 올해 한국에서 시조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조 생활> 142호에 노후의 정」이라는 작품이 픽업되어 마침내 시조로도 좋은 평가를 받아 등단이 되었으며 시상식은 5월 27일 한국 기독교회관에서 갖게 된다.
임영희 시인의 시집은 많은 교훈을 준다. 나이 80이 되고 뇌졸중으로 쓰러져도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나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아름다운 결실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오애순 부부 못지않게 임영희, 임용근 부부의 이야기도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임 시인뿐만 아니라 임용근 전 의원 또한 극복과 성공의 아이콘이다. 1935년 경기도 여주 시골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 별세 후 어려운 가정 속에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17세부터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는 7년여 간의 투병생활로 정신 이상자로 몰리는 고통도 당했다. 가정이 어려워 고교시절에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미군들의 구두를 닦는 등 온갖 고생을 했다.
더 큰 아픔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6.25때 공산당으로 몰려 남한 정부에 총살당했기 때문에 빨갱이 가족이란 빨간딱지가 붙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을 나왔고 빨갱이 가족 낙인으로 한국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미국에 온 후 부부가 청소부, 페인트 일 등 온갖 궂은일을 했다. 그리고 부부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고 미국 한인 이민 사상 최초로 오리건주 상,하원 5선이라는 금자탑을 이루었다. 또 2년 전 88세에 자서전 '버려진 돌, Rejected Stone'을 출간했다.
이같은 고난들을 극복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임용근 전의원과 임영희 시인은 결혼 62년째 서로 아름답게 무르익은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믿었기에 /뜨거운 가슴으로 빈손 맞잡고 /
아름다운 무지개 바라보며 / 첫발 내딛던 굽이굽이 오솔길 /
이삼십 대 청춘에 두려움 있으리 / 산 넘고 강 건너 바다 가르고 /
지구촌 반 돌아 이곳 푸른 초장에 / 보금자리 튼 지 어언 반백 년 넘어 온 젊음 다 바쳐 간난신고 끝 / 아메리칸드림도 성취했고 / 사랑의 열매들도 각각 제 둥지 찾아 떠났네요 / 꽃은 피고 지고 또 피어나 아름다운데 /우리들 머리에는 흰서리 내려앉고 / 탱탱하던 피부는 잔주름이 늘어갑니다 /오랜 세월 세상 풍상 헤쳐가며 / 어렵사리 지탱해 잡아 온 손 두 손 꼭 잡고 / 못다 한 이야기 줄줄이 엮으며 / 손자들의 크는 모습도 즐겨 보면서 / 높은 하늘 무지개 저 끝까지 /우리 함께 쉬엄쉬엄 가고 싶습니다.“(두 손 꼭 잡고)
드라마 제목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어로 '무척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는 80세에 뇌졸중을 겪으면서도 남편의 두 손을 꼭잡고 아픔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시집을 펴낸 임영희 시인에게 진정으로 큰소리로 말하고 싶다.
“폭싹 속았수다, 임영희 시인!”
이동근 (전 시애틀 중앙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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