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도 중반, 나의 첫 직장이었던 미국 기업을 떠나 개인 회사를 설립을 하여 더욱 열정적으로 노력을 하다 보니 좋은 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날이 늘어나는 매출에 따라 직원들의 숫자와 화물 선적 물량도 늘게 되면서 산타모니카에 소재한 나의 사무실도 차츰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요 거래처와 LA 공항이 가까운 곳의 고층 건물로 이전을 했다. 사무실 내부를 멋지게 단장하고 대표실도 별도로 만들어 나름 품위 있게 꾸몄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출근하는 데 자동차로 30분 정도가 소요가 되었지만 운전하는 동안에 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주요 거래처 사장이 그의 50세 생일 파티에 그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미국에서는 50세 생일을 우리나라의 환갑잔치 하듯 특별하게 기념모임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나는 깔끔한 복장에다 미장원에도 들른 뒤 준비된 선물을 들고 파티 장소로 갔다.
그 사장은 LA에서도 현대식 고층건물이 즐비한 센추리 시티(Century City, Beverly Hill)의 파크 플레이스라는 곳에서 가족과 살고 있었다. 파크 플레이스는 철제 담장을 곳으로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정문에서부터 출입자들과 차량을 통제하는 등 철저하게 외부와는 차단이 된 현대적이고 호화로운 주거 단지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대부분 유명 배우들과 방송인, 정치인 그리고 성공한 사업가들이 입주민들이라고 했다. 경비의 까다로운 검문을 지나고 정문을 통과하자 3층짜리 콘도 몇 동이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가운데 형형 색깔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화단들이 단지 전체의 공간을 화려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각 단지 사이로 산책 공원과 수영장, 이 외 피트니스 센터, 테니스 코트, 주민전용 파티룸 등 현대식 여가 시설들이 잘 구비되어 있었는데 나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함의 극치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도 하나 같이 그렇게 여유 있고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속에 나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파티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그들만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파크 플레이스 파티에 다녀온 그다음 날부터 갑자기 나는 매일 오가던 출퇴근 길이 갑자기 멀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곳이 더 이상 편안하지가 않았다. 눈부신 환한 햇살 속에 자리한 그 콘도 단지가 늘 내 눈앞에 어른거려 근무시간에는 물론 밤잠까지 설치게 만들었다.
누구나 갖는 꿈이겠지만 나도 ‘아메리칸드림’ 속에 나만의 멋진 집을 갖고 싶었는데 그 꿈속의 집이 드디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하루빨리 그곳에 입주하고 싶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내 마음을 들쑤셨다.
다시 가보지 않으면 병이 날듯하여 견디다 못해 며칠 뒤 그 콘도 단지 앞으로 다시 가 보기로 했다. 초현대식 고층 건물에다 최고급 쇼핑몰, 그리고 슈퍼마켓, 영화관이 모두 도보 거리에 있고, 특히 단지 바로 앞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미스 유니버스 대회 같은 국제 행사가 열리는 슈베르트 극장도 있었다.
유명 체인 호텔과 20세기 폭스 스튜디오 등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사, 명문 골프장도 모두 지척에 있어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영화 '다이 하드' 촬영지이자 레이건 미 대통령의 개인 집무실이 있는 폭스 플라자 빌딩도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나는 그 콘도와 그만 사랑에 빠졌다. 당장 그런 곳에 들어갈 형편은 되지 않았지만, 나의 멋진 꿈과 목표를 쫓아 여기까지 왔던 내가 아닌가. 우선 동네라도 살펴보고 동기부여라도 갖고 싶어 출퇴근 길에 콘도 주변을 돌아보기로 작정을 했다.
출퇴근 시간이 배로 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콘도 주위를 돌면서 간접 경험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문을 지키던 경비원이 나의 이상한 행적을 알아챈 듯했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왜 당신은 매일 이곳에 와서 주변을 배회하는 거지?”라고 물었다. 나는 주저하다가 ‘나는 이곳에 친구 초대를 받아 가본 적이 있었는데 이곳의 환경과 시설에 홀딱 반했다’ 그리고 “하지만 아직 이곳 집주인이 되기에는 조건이 되지 않아 돈을 더 벌어야 한다. 그래서 수년이 걸릴지라도 그때까지 나는 우선 울타리 바깥에서 나마 한 번씩 둘러보고 싶다"라고 했더니 그 경비원은 도리어 나에게 환하게 웃어 주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당신이 속히 이 집의 주인이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행운을 빈다”라며.
그렇게 한 사람의 정신적 후원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뻔질나게 그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문 앞에 ‘파크 플레이스 집주인 되기’ 글씨를 크게 써 붙여놓고 아침마다 큰 소리로 복창을 한 후 출근길에 나섰다. 그날부터 회사에서 업무에 임하는 자세가 180도 달라졌다.
우선 진행 중인 건 들을 제대로 분석을 해 보았더니 조금만 더 노력을 하면 계약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사업들이 눈에 띄었다. 그때는 보통의 일과시간 오전 9시부터 5시까지가 아니라 반대로 오전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을 한 듯하다.
집에 와서도 한국 시간대에 맞춰 심야는 물론이고 새벽에도 서울 지사장과 거래처 담당자들과 통화를 하면서 계약 가능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다. 그 당시 그렇게 미친 듯이 일에만 파묻혀 지내면서도 피곤함을 못 느끼는 게 신기했다. 무언가를 목표를 앞에 두고 무한한 몰입을 할 때 나타난다는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Flow Theory)' 효과를 본 듯하다.
당시 거래은행이었던 퍼시픽 세큐리티 뱅크 산타모니카 지점장 빌은 내 계좌에 입금이 될 때마다 곧장 연락을 해주었다. 그 당시 그는 나의 드림하우스 입주를 위해 함께 달려준 중요한 파트너나 다름없었기에 계약금이 통장에 찍힐 때마다 나 못지않게 신이 나 했다.
파크 플레이스 동네 주민이 되겠다는 마음을 품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빌이 만나자고 해서 은행에 갔더니 내가 이제 그 집을 구입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했다. 전혀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곳에 당장 가 보자면서 나를 앞장 세웠다.
현장에 같이 갔더니 마침 콘도 몇 채가 매물로 나와 있었고 그중에서도 폭스 플라자 빌딩이 거실에서 곧장 보이는 집이 마음에 들어 그냥 그렇게 집주인이 되는 첫 순서를 밟았다. 빌이 나를 다신 해서 주택 구매용 서류작성을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처리를 도와주었다. 셀러와 몇 번 흥정이 오가면서 드디어 매매 계약과 명의 이전 등록절차까지 순조롭게 그리고 완전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
태평양을 건너 광활한 대륙 한가운데 첫발을 디딘 무일푼의 한국 청년이 불과 몇 년 만에 ‘드림 하우스’에 둥지를 틀게 된 날이 밝아왔다. 이사하기에 딱 좋은 따스한 봄날이라 정원의 꽃들이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이삿짐을 싣고 철대문 앞 수위실로 향했다.
마침 현장에서 나에게 큰 손을 흔들어 주며 환영해 주었던 사람은 바로 그 경비 아저씨였다. 일 년 동안 단지 밖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 경비 아저씨의 따스한 거수경례를 받으며 파크 플레이스의 커다란 철문을 통과했다. 집주인의 자격으로 당당하게 말이다.
그때의 그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CEO, LTC 이노베이션, Inc.
싱가포르국립대학교 경영대 초빙교수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외이사
저서 : 'Wonder', 'Tomorrow', 'Moving' (영문판, 한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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