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그들은 줄을 선다. 새해부터 얼굴을 들이밀려면 지금부터 작전을 잘 짜야한다. 누군가는 연말에 줄을 서는 것이 상 받는 데에 훨씬 유리하다고 하지만,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하게 예쁘고 잘생긴 얼굴들을 앞세우며 출발선에 서 있다.
2025년 드라마 기대작 10편. 스릴러부터 로맨스, 첩보 액션, 좀비물까지. 입맛을 몰라 다 차려봤습니다,라고 하듯 아주 상다리가 부러진다.
스크롤을 내리며 시놉시스를 읽어봤는데 기다리던 이야기는 없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채널마다 과거에서 오든, 미래에서 오든 마치 시간은 이제 이야기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타임슬립물이 많았다.
사람들은 곧이라도 타임머신이 실제가 되어 우리도 조선 시대의 남자와 연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로 날아가 인류의 마지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상상을 진지하게 말하기도 했다.
새 학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딸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예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숄도 걸친 모습이 영락없는 파티 현장이다. 학교에 잘 돌아왔다고 하는 파티라기엔 늦고,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도 두세 달 후라 이 파티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무슨 파티? 간단히 문자를 보내니 금방 답장이 왔다. 새해 파티.
미국 학교 일정은 보통 9월부터 시작한다. 날씨에 따라 조금 당겨지거나 뒤로 밀리기도 하지만 새해가 가깝지는 않다. 아직 물음표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때, 딸의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여긴 2017년이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난 지금 과거로 돌아간 딸하고 문자를 주고받고 있다. 타임슬립 드라마 주인공처럼.
휴대전화 자판 위에 올린 두 엄지손가락이 얼음땡 놀이를 하다가 얼음, 을 외친 아이처럼 삼십 초 정도 멈춰 섰다. 땡, 을 해 준 건 딸의 세 번째 문자였다. 음식을 담은 하얀 접시 사진이었는데 그 정체가 애매하다.
한국 음식은 분명 아니고, 미국 음식도 아닌 것이 멕시코,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 독일, 프랑스 등 내가 아는 나라 모두를 지구본처럼 빙글빙글 돌려도 답을 찾을 수 없다. 카레인가 싶지만, 소스처럼 적은 양을 여러 종류로 늘어놨다. 난이나 부침개 같은 것도 보였지만 확실히 그것들과는 달랐다.
네 번째 문자는 딸이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연달아 다음 문자가 달렸다. 에티오피아 새해인 엔쿠타타쉬 파티에 친구와 함께 왔어. 룸메이트 중 에티오피아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후에 들어보니 그들의 달력인 게즈력은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과 달라서 지금이 2017년이라고 했다.
그제야 날 혼란스럽게 만든 의문점이 모두 풀렸다. 처음이었다. 나와 다른 시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 건. 우린 모두 같은 시간 속에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세는 방식이 다르니 날짜도 달라진다. 무려 1년에 13개월을 산다. 그래서 에티오피아를 ‘13월의 태양이 뜨는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의 2024년도 새해는 우리 시간으로 계산해서 11월 9일이었다.
엔쿠타타쉬는 보석 선물이란 뜻이다. 시바여왕과 솔로몬왕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단어지만 새해를 보석 선물이라고 부르는 건 꽤 낭만적이다. 누군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하루, 한 달, 한 해 이런 시간 단위는 리셋 버튼이라고 했다. 실패한 하루도, 엉망이 된 한 달도, 이룬 것 하나 없는 한 해도 모두 다시 시작할 기회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몸도 하루를 일하고 잠들었을 때 모든 장기가 회복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했던 우주 원리를 한의학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되돌아가고 싶은 후회스러운 시간이 있다. 고쳐서 되돌릴 수 있다면 타임슬립이 아니라 타임머신을 만들어서라도 가고 싶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시간의 역행을 막는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의 전철을 따라가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전인권의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딸은 2017년에서 다시 2024년, 그리고 이제 2025년에 와 있다. 보석 선물 같은 새해를 품에 안고 출발선에 줄을 선다. 올해도 우리에게 다가올 스릴러, 로맨스, 첩보 액션, 좀비물 등 수많은 드라마가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져 있지만 연말 시상식 땐 또다시 용기 있게 시작한 우리에게 신인상이라도 주어지길 기대해 본다.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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