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주시의 북부에 있는 수름재 새터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수름”은 ‛술’의 고어이고 “재”는 ‛고개’를 뜻하는 말이다. 새터에서 청주 우체국까지의 거리는 십 리 반쯤 되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군청에 다니셨다.
내가 그 당시 읍내 국민학교 다니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가 건네 주는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를 손에 들고 대문을 나섰다. 이웃집 아주머니도 와서 새참이 담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앞서서 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일꾼이 “큰아기가 주는 바람 시원하구나!”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충북 지도에 보면 충청대로에 ‛수름재 삼거리’라는 이름이 있다. 오른쪽 도로 주변에는 옛날에 주막거리가 있었다. 동쪽에는 새터, 셋집매, 뚜껑샘거리, 구성리, 산기슭에 자리한 강당말이 있었다. 강당말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영정이 봉안된 목은영당(牧隱影堂)이 있었는데,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 당시 새터에는 나를 포함해서 닭띠 소년 4명이 있었다. 우리들은 책보를 겨드랑이에 끼고 마을 밭둑길을 걸어서 신작로로 나와 청주에 있는 영정공립국민학교에 걸어다녔다. 혼자 걸을 때는 일본어 이야기책을 읽었다.
나는 영정 국민학교 5학년 때 8·15 해방을 맞았다. 우리 닭띠 소년들은 학교에서 한글을 배웠다. 우리들은 동네 어린이들을 모아서 ‛신소년’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공휴일에는 삽을 들고 장마로 망가진 동네 길을 고쳤다.
어느 가을날 닭띠소년들은 동요(童謠)라는 말의 뜻도 모르고 친구네 사랑방에 모여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어린이들은 동네에 최초의 동요가 생겼다며 그 당시 유행하던 ‛희망가’의 곡에 맞추어 동요를 불렀다. 광복절에는 이장 집 바깥마당에 모여서 ‛새터 동요’를 합창했다.
우리 동네 새터 동네 열여섯 집이
마음을 합하여서 나아갈 우리들
동쪽에는 모래재 남쪽에는 우암산
바다 없는 충청 북도 신대 부락일세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나는 동네 소년들과 학교에서 돌아오다 주막거리를 지나가게 되었다. 술집에서 동네 아저씨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새터 동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술집 여인이 “세월아 가지를 말어라.” 하는 소리도 들렸다.
1950년에 뜻밖의 6·25사변이 터졌다. 주막거리에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하루는 우리 집에 모자를 쓴 신사가 피난민 가족을 끌고 찾아왔다. 이북 원산에서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들을 사랑마루에 안내하고 밥을 대접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닭띠 청년 두 사람이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갔는데 그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나중에 동네 아저씨에게 나머지 닭띠 소년에 관해 물어봤더니 그 닭띠 소년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교직에 몸담고 있던 형과 고등학교 학생이던 나는 부모의 권고로 일찍이 부산으로 피난 갔기에 친구들이 겪은 불행을 모면했다.
세월이 흘러 수름재의 새터 동네 청년인 나는 1961년 그 당시 외무부 통상국에 근무하게 되었다. 외무부 문서국 여권과에서도 일했다. 일본 지역에서 재외 공관 생활을 할 때는 부하 직원 3명이 모범 공무원으로 뽑혀서 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공무원들은 표창장을 받으면 긍지를 느끼며 명성도 얻었다. 내 생전에 이렇게 즐거운 일은 처음 겪었다.
내가 외교안보연구원에 근무할 때인 1978년의 일이었다. 외무부에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나는 분량이 366페이지에 달하며 파란 표지에『外交文書作成法』이라는 글씨가 쓰인 연구서를 써서 외무부 본청과 재외공관에 배포했다. 해외 공관에 부임하는 외교관과 주재관들이 사무실에 와서 내 저서를 찾았다. 훗날 외교안보연구원 도서관에 전시된 저서를 목격하자, 대단히 기뻤다.
1992년 6월에 나는 직장을 정년 퇴직 하였다. 나는 여가에 서재에 들어앉아 531페이지에 달하는 『英語書翰文作成法』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4판 3쇄까지 출간하게 되었다. 출판을 맡아 주신 일지사 김성재 사장의 노고가 고마웠다.
나는 저서를 가지고 고등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이 책에는 외교, 공용, 상업, 사교, 펜팔 가이드, 그 밖의 영문 편지 작성에 관한 요령과 현장감 있는 예문이 실렸다. 저자가 직장에서 습득한 영문 편지에 관한 지식과 아내가 수집한 영문 편지와 자녀들이 미국 유학 중에 모은 편지들을 바탕으로 해서, 후학들을 위해 집필했다.
김성재 사장은 1997년 3월에 내가 학생들을 위해 쓴 『영문 편지 쓰는 법』을 2쇄까지 발행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 나라에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연구 자료의 수집이란 습관성이 있어서 나는 김성재 사장이 작고한 후에도 영문 편지를 수집했다.
나는 2007년 10월 『소렌토 아리랑』이라는 수필집을 세상에 선보였다. 나의 첫번째 수필집 발간이다. 도서출판 문학관에서 출판했다. 이 수필집에는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3편 들어 있다. 내가 역작으로 생각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수필도 들어있다.
이 작품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도요토미 히대요시’를 만난 결과를 어전에 보고할 때, 상사인 황윤길은 “병화가 반듯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뢴 반면 부사인 김성일은 “그런 징조를 보지 못 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들이 가져온 왜서에는 “率兵超入大明”이라는 글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그런데 문학 평론가인 이어령 박사가 지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책에 보면, “만약 그 때 눈치가 아니라 과학적 판단에 의해서 그 것을 처리했던들 임진왜란이라는 그 처참한 전화는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명나라의 군사를 미리 주둔시킬 수도 있었겠고, 혹은 순순히 길을 빌려 주어 오히려 어부지리를 볼 수도 있지 않았나 싶다.”라는 글이 나온다.
나는 이 글을 읽은 소감을 수필에 적었다. 나는 글로 냠겨두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삐어서 타자로 치지 못한 글감이 있는데, 그건 1990년 4월 6일 아시아나 항공의 1호기가 센다이(仙代)에 취항했을 때의 ‛화려한 광경’이다. 나는 혼마슌타로(本間俊太郞) 미야기현 지사와 함께 아시아나 항공 취항 축하 테이프를 끊었다. 아내는 주지사 부인과 친목을 도모하며 지냈다.
내가 단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달고 있는 아시아나 항공기 앞에서 아시아나 항공 취항 축사를 할 때는 나도 몰래 눈물이 났다. 외국에서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 늦게나마 글로 아시아나 항공의 취항을 위해 노력하신 미야기현 현민과 동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 후 새월이 흘러 우리 부부는 2009년 9월 10일 서울을 떠나 미국 워싱턴주 뷰리엔(Burien) 시에 있는 크리크 마을(Village at Miller Creek)로 이민 오게 되었다. 마을이 뾰족집으로 구성된 동네였다. 앞쪽 도로변에는 연어가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림과 ‛THIS STREAM IS IN YOUR CARE’라는 안내판이 여기저기 꽂혔는데, 연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2011년 9월 나는 『시애틀의 낮달』이라는 두번째 수필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서울에 있는 도서출판 선우미디어에서 출판하였다. 이 수필집은 그 당시 한국수필가협회 정목일 이사장으로부터 제9회 해외 한국수필문학상을 받았다. 이 수필집에는 내가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네 편 들어 있다.
나는 수필집을 도서관과 동포들의 문학 단체에도 보냈다. 미국에 와서 사는 동안 알게 된 페더럴웨이 노인정의 이영수 선배는 2014년 5월에 시애틀에서『내가 살아온 평생의 길』이란 회고록을 냈다. 선배는 머리말에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는 내 나이 90여 세에 이르도록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랑할 만한 공적 없이 헛되게 보내온 것을 후회한다"라고 적었다.
이영수 선배는 강원도 여러 곳의 농촌지도소장을 지냈으며 통일벼 개발과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선배의 회고록에 보면 저자는 조선 왕조 네 번째의 임금 세종대왕의 후손이다. 장남과 차남과 장녀가 한국에 살고 차녀는 미국 페더럴웨이에 산다.
2015년 9월 12일 오후 우리 부부는 워싱턴대학교 도서관 강의실을 방문하여 재미 한인 작가 이매자(Maija Rhee Devine)로부터 『The Voices of Heaven』이란 소설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하늘의 목소리’라는 뜻이며 저자 양어머니의 실제 이름인 음천(音天)을 영어로 번역했단다.
이매자 작가의 소설 서두에는 “In memory of my loving parents, who adopted me and gave me life”라는 글이 있다. ‛나를 입양하고 나에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부모님을 기리기 위하여’라는 말이다. 작품인즉 주인공이 이매자 자신이고 사료적 가치가 풍부하며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표현된 자전적 소설이다.
그 당시에는 남녀 쌍둥이가 태어날 경우 사회 풍습에 따라 여자아이는 애가 없는 남의 집에 입양 보냈다. 이매자 작가는 1943년에 변호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트럭 운전사의 집안에 입양되었다. 이매자 작가의 양부모는 부부 금실이 좋았고, 입양한 딸을 아꼈다.
이매자 작가는 서강대학교(서울)에서 B.A를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M.A를 받았다. 그 후에 귀국하여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평화 봉사 단원으로 한국에 체류 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다시 도미했다. 미국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내가 이매자 작가에게 수필집 『소렌토 아리랑』과 『시애틀의 낮달』을 보냈더니, 작가는 시집 『Long Walks on Short Days poems by Maija Rhee Devine』하고 자기가 만든 ‛거북선 책꽂이’하고 “ 2권의 수필집 아주 잘 읽었습니다.”라는 말이 적힌 카드를 보내 왔다. 올해 아흔 살인 내가 뒤늦게 문우를 만나 우정을 나눈다고 생각하니 인생의 환희(歡喜)를 느낀다.
2019년 5월 아내가『엄마 이야기』라는 수필집을 냈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해드림 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서두에 아내는 “나이가 들고 보니, 밤잠 잃은 밤에는 눈 감고 누워서 나 혼자 켜켜이 묵은 추억을 회상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글로 써 보았다"라고 적었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자기가 쓴 책을 읽노라면, 나는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가정에 남기고 싶었다. 수름재 고향을 생각하면 나는 <새터 동요>를 르던 죽마 구의(竹馬舊誼) 친구가 그립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이민 올 때, 나는 기념으로 『한문과 영어로 고전 읽기』라는 책을 샀다. 지리산 청학동의 김봉곤(金烽坤) 훈장과 국제 변호사 하일(Robert Holley) 박사가 지었다. 책 표지에 훈장이 회초리를 양손에 들고 하일 박사 옆에 서 있는 그림이 있는데, 실감이 난다.
내가 비행기 안에서 책을 열었더니, 제일 먼저 "忍一時之憤(인일시지분)이면 免百日之憂(면백일지우)니라”는 글이 나온다. 한국어로 말하면 “한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할 수 있다.”라는 뜻이요, 영어로 옮기면 “If you forbear your anger just one time, you can escape one hundred days of worry”라고 쓴다는 것이다.
글인즉슨 내용이 아름답다. 우리 부부가 미국에 도착하면 손자 손녀들에게『한문과 영어로 고전읽기』를 소개해야겠다. 자손들이 이런 책도 벗으로 삼고 살아가면 좋겠다.
이경구
수필가. 1998년 <한국수필> 등단
작품집: 소렌토 아리랑, 시애틀의 낮달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현재 위싱턴주 뷰리엔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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