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럽게 순한 계집애가 뭐야. 게다가 성까지 ㅅ이 들어있어 발음하기도 어렵고. ‘순’자에서 ㄴ하나만 빠트려도 그런대로 괜찮았을 텐데. 아버진 딸 넷 이름을 ‘순’자 돌림으로 쭉 지으셨다.
밑으로 갈수록 이름이 세련돼갔지만 둘째 딸인 내 이름은 흔하디흔한 순희. 그토록 흔해도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바둑이는 영이와 놀았고, 뭇 노래 가사에서 그리워하는 이름은 순이가 더 어울렸나 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 이름은 변방에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만 자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름처럼 순박하지 않다고 우겼다. 스스로 꽤 도회적이라 여겼다. 이름에 대한 자격지심인지 누가 이름을 물을 때면 잘 못 알아들을까 봐 순할 순順 자에 계집 희姬 자라고 덧붙였다. 사실은 또다시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그래도 언니 이름보다는 조금 낫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순전히 나의 주관일뿐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교실에는 없었다. 대학 가서는 전국에서 모인 탓인지 같은 학과에 같은 이름이 셋이나 되었다. 전주에서 올라온 순희, 대구에서 온 순희 그리고 서울 토박이 내 이름까지. 나는 개성 없는 그 이름 셋을 출석 부를 때마다 고개를 못 들었다. 그땐 정말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딸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이름을 지으셨나 보다. 순희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여고 다닐 때 한 반 친구 이름이 아주 품위가 있었다. 지극히 서민적인 내 이름과 달리, 그 아이 이름은 아버지가 심사숙고해 지은 게 틀림없었다. ‘귀한 꽃’이었는데 성姓마저 높았다. 얼마나 딸을 애지중지했을까 부러워하며, 나의 성姓 ‘신申’에 걸맞은 이름은 무엇이 있을까 혼자 생각하며 개명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진 내 성이 잔나비를 의미한다고 하셨으니,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원숭이 재주꾼이라고.
그래, 내 이름은 흔하지만, 성까지 붙이면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여태껏 주변에서 순희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신순희는 못 봤다. 나름대로 희소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하고 성까지 같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 아닌가. 어디 한번 뒤져보자. 아이코, 나의 예상을 뒤엎고 말았다. 이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나 말고도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평범한 나의 아버지, 평범하게 살라는 그렇게 깊은 뜻이... 그러게 범사에 감사하자.
그러다가 나는 시애틀에서 또 하나의 순희를 만났다. 저온살균 쌀 막걸리 ‘순희’ 출시. 하다 하다 이제는 술 이름까지 등장하다니.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순희를 언급하며 떠들어댔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낯이 뜨거워지며 홀로 부끄러워졌는데 알고 보니 술이 아닌가. 후유, 안도감 끝에 이번에는 술잔을 높이 들고 ‘위하여’를 외치는 장면이 상상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이일 저일 겪는다지만 내 이름이 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남편은 한인 마켓에서 뿌연 막걸리를 한 병 사 왔다. 콜라병을 닮은 병 허리에는 ‘순희 純喜 한국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한문이 달랐다. 막걸리 이름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어쨌거나 남편은 실실 웃으며 이 막걸리를 한 잔 따랐다. 아주 즐겁고 흡족한 표정으로 나 한번 쳐다보고 술잔 한번 쳐다보고. 그러니까 한국의 순희는 보편타당한 이름이란 말이렷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시애틀에 살고 있지만 뿌리는 엄연히 한국에 박혀 있다.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여자 이름으로 순희만 한 이름이 또 있겠는가. 시애틀에만 해도 얼마나 많은 순희가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보면 나 아닌 다른 순희를 호명할 때가 종종 있다. 태평양을 건너와서도 변질하지 않은 그 이름, 어디에 있던지 내 이름은 순희.
이제 세월이 조금만 더 흘러가 봐라. 순희란 이름 듣기 힘들 것이다. 역사 속 이름이 될 것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딸 이름을 순희라 짓겠는가. 그 이름 사라지기 전에 자주 불리면 좋겠다. 지나간 바람이 어쨌든지 이제는 순풍처럼 살고 싶다. 요즘 나는 이름답게 점점 더 순해지고 있다.
신순희
수필가, ‘월간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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